서문/ 진예리
 She plays herself

 타자에 대한 불안은 주체 너머의 불신으로부터 비롯된다. 누군가를 신뢰한다는 것이 얼마나 길고 고된 여정인지, 계속해서 자라나는 불신의 불씨를 꺼뜨리고 얼마만큼의 불안을 걷어내야 마침내 누군가를 신뢰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되는지. 그리고 이 여정 속에서 나는 얼마나 많은 오해와 실수를 범하며 타인을 재단하고 주제넘은 판단을 하는지. 만원 버스 속에서 어쩔 수 없는 부딪힘에 미리 마중 나오는 찡그림, 마치 나는 그 부딪힘을 선사하지 않는 사람인 양. 과연 나는 그럴 만큼 깨끗하고 떳떳한가? 성지윤은 이러한 불편함 속에서 자신을 주체 너머 타자의 영역으로 슬며시 밀어 넣어 본다. 거부와 수용이 교차하는 외다리 위에 아슬아슬하게 자신을 올려놓는다. 다가가지 않는 것 외에 도망치는 선택지는 없도록 폐소적인 시스템을 설계하고, 그 안에서 유희와 절망의 스펙트럼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작가는 “나의 겨드랑이에선 향기가 납니다. 그러니 부디 도망치지 마세요.”라는 대찬 선언을 통해 일종의 반어적인 블랙코미디 같은 처절함 속에서 닿지 못할 타인을 향해 어떻게든 손을 뻗어보려는 희망을 시도로 옮겨본다.

 <floral404>는 꽃  물(object)의 교환 과정과 404라는 인터넷 에러 코드라는 결과의 합이다. 당근마켓의 나눔을 빙자한 교환 시스템을 활용하여 온라인과 대면을 오가며 훈훈한 만남을 상상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낭만적으로 설계한 이 실험은 에러 코드가 되어버린다. 첫 나눔에 성공한 후 기세가 등등해진 작가는 대량의 꽃을 구매하며 사랑이 만개하는 미래를 머릿속에 그렸다. 그리고 꽃을 물들이는 일에 능숙해지며 시행착오를 줄여나가기 시작했을 즈음, 이 과정은 그녀에게 아름다운 놀이가 되어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처럼 그녀에게 오는 연락은 감감 무소식이 되었다. 시들어가는 꽃들을 사진으로 찍어 보내며 자신의 좌절된 마음을 내게 전하던 날을 기억한다. 작가는 어설픈 고백을 준비하고 보기 좋게 차인 어린애처럼 절망했다. 도저히 연락이 오지를 않아, 당근마켓 게시물의 홍보 글귀를 ‘나는 당신에게 아름다운 꽃을 줄 테니, 내게 필요 없는 물건을 버리라’는 뉘앙스의 문구로 바꾸자  그대로 그녀에게 쓰레기를 버린 사람들은 내심 기대에 차있던 작가의 마음에 몰래 꼬집은 듯한 작은 멍 자국들을 남겼다. 작가가 이를 예상하지 못했을 리 없다. (솔직히 나는 이럴 줄 알았다) 사실 작가는 이를 알면서도 마음 한 켠에 품어온 청사진을 제 손으로 구긴 셈이다. 이 마음은 간절함일까 구차함일까. 그런데 프로젝트를 진행할수록 성지윤은 자신에게 정말로 쓰레기를 주던 사람들에게조차 점차 고마움을 느낀다. 이렇게나 예쁜 꽃을 주는데 정작 잘못 던진 부메랑처럼 돌아오는 못난 물건들을 끝내 수용하며 변화하는 그녀의 감정을 지켜보면서 묘한 감정이 들었다. 사람이 참 간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의 작업을 위해 이내 못난 물건들을 어여뻐하는 지경에 이르는 그녀의 모습에 미미한 슬픔과 즐거움을 동시에 느꼈다. 또한 나는 성지윤의 꽃 ↔ 물(object) 교환의 대상이 대체로 중년여성이라는 점이 흥미로웠다. 작가는 시간적 여유가 적적함으로 변환된 여성들을 만나고 누군가는 그 꽃에 깃든 작가의 손길을 종종 상상해 보며 특별한 추억을 오래도록 간직할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세세한 내용들이 적힌 그녀의 당근일지와 채팅 내용들을 접했을 때, 누구의 허락도 필요치 않은 제삼자의 관찰자로 그 상황을 잠시 훔쳐보는 상상을 했다. 나의 상상 속에서 이 집착적이고 노고 가득한 교환실험의 낭만은 사실 물건을 직접 교환하는 그 찰나에 있었다. 마치 소개팅 어플을 사용할 때의 긴장과 기대감처럼 비대면과 대면의 단계적 만남 속에서 손길과 옷깃이 스치며 모종의 긴장과 불신, 실망, 때론 환희를 감추고 포커페이스로 미소를 유지하는 그 찰나에.

 <TT>는 <floral404>의 소통과 만남의 준비 단계를 건너뛰고 보다 게릴라적인 사회 실험에 가까운 작업으로 결국 성별과 연령에 있어 유의미한 카테고리로 귀결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그저 무모한 사랑이, 자신의 다가감이 불특정 다수에게서 얼마나 돌아올 수 있느냐이다. 성지윤은 플란다스의 개와 성냥팔이 소녀처럼 처량하고 겸연쩍은 마음을 뻔뻔함으로 갈아 끼우고 힘차게 나아간다. 아름답고 화려한 꽃 무더기에 길거리 여기저기에서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내며 사람들이 다가온다. 꽃은 마로니에 공원과 홍대거리를 지나며 호객 행위에 한번 사람이 몰리면 우르르 줄을 선다. 상호명 없이 길거리에서 주는 혹은 파는 행위에 대한 경계심은 화려한 꽃과 검소하고 꾸밈없는 카메라맨 1의 호객 행위로 완화된다. 이때 그들이 생각하는 신뢰의 지표는 다수성과 안전성이다. 헌데 유감스럽게도 작가가 직접 호객을 할 땐 사람이 잘 모이지 않았다. 하지만 동행한 카메라맨 1의 호객엔 많은 인원이 몰린 이유는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카메라맨 1의 곧고 차분한 목소리와 단정한 옷차림은 이 프로젝트가 요구하는 은근한 분위기에 적합해 보인다. 작가는 왜 이날 한껏 신경 써서 단장을 하거나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임하지 못했을까? 작가가 말하길, 자기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단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 또한 작가가 어떤 TPO를 취했어야 할지 머릿속에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우아하고 고풍스러웠어야 하나? 아니면 앞치마라도 하나 둘렀어야 할까? 언제나 정답이 왜 정답인지는 바로 알겠으면서도 오답 속에서 정답을 찾아내기는 힘든 법이다. 그래서 작가는 전략을 바꾼다. 전면에 나서서 정석적인 방식으로 호객을 하기보다, 꽃에 관심을 보이는 행인들을 교묘하게 유인한다. 그녀는 인형뽑기 기계 앞에 서서 꽃을 흘긋거리며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이 꽃을 얻기 위해선 돈이 아닌 무언가를 가져와야만 한다”고 말한다. 정공법으로 임무를 수행해 낼 깜냥이 안된다면, 이렇듯 빠르게 태세를 전환할 줄 알아야 한다. 결국 그녀는 이러한 자조를 음흉한 유희의 태도로 치환해 내는 것에 성공한다. 그들은 이 인형들을 작가가 찢고 터뜨리며 조각조각으로 분해하여 자신의 작업으로 속박시켜 버릴 것이란 것을 까맣게 모르겠지. 그 꽃의 아름다움과 달콤함을 소중함으로 기억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작가의 이런 음흉함은 이내 하나의 에피소드로 인해 그 효력을 잃는다.

 전시장의 입구에 있는 사진은 유일하게 영상 밖으로 훼손 없이 온전하게 초대된 에피소드인데, 사진 속의 구둣방 아저씨는 내가 중년 남성에게 느껴오던 생각의 두꺼운 퇴적층을 사뿐히 즈려밟는다. 꽃과 무언가를 교환하자는 작가에게 아저씨는 무엇으로 보답하면 좋겠냐며 물었고, 작가는 가장 값싼 소유물처럼 보이는 신발 끈을  짝 달라고 한다. 신이 난 아저씨는 신발 끈 한 묶음을 모두 주겠다며 버선발로 다가온다. 어린 소녀처럼 웃으며 꽃을 들고 행복해하는 아저씨의 모습에, 연령과 성별의 스펙트럼 속 고정된 좌표가 녹아내린다. 경계가 희미해지고 부드럽고 따뜻한 기운이, 두껍게 고착된 나의 고정관념 주변을 맴돈다. 나는 이 사진을 작업의 여러 교환 에피소드의 (그토록 싫어하던 단어였던) 홍일점이라 부르고 싶다. 이쯤 되니 글을 쓰며 작가가 만난 사람들의 성별과 연령에 대해 분석적으로 접근하던 사고회로가 톡 하고 끊어진다. 그런데, 그 아저씨는 그 꽃을 어떻게 했을까? 나는 지금, 만나본 적도 없는 그 아저씨의 꽃의 현재를 자꾸 그려본다. 나도 그 아저씨한테 무언가를 주고싶다는 상상을 한다. 그녀의 작업을 통해 만난 타자가 내 안에서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다. 

 위의 두 실험을 끝낸 뒤, 작가는 더욱 적극적으로 타자가 남긴 자신의 현재를 만들어 나간다. 실험의 잔여물들은 기워진 타임라인이 되어 전시장 곳곳에 놓여있다. 또한 그중 일부는 전시장 중앙의 <Fountain Play>와 <슈 솝> 제작에 사용된 에센스 오일의 침출물로 활용된다. 그런데 개인마다 고유한 향(실은 냄새에 더 가까운)이 있다고는 하나, 담금주 병에 뒤섞여 절여진 사물들로부터 추출한 오일에서 유의미한 향 혹은 냄새가 날까? 이는 작가가 향이라는 개념에 이 사물들을 은근슬쩍 편승시키는 것에 가깝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여기서 향의 역을 도맡는 재료는 비누이다. 그러므로 담금 주 속 오일과 교환물들은 끝내 별 유의미한 영향을 가하지 못한 채, 일종의 맥거핀처럼 남는다. 향의 주체일 것처럼 제시되지만, 실제로 향의 역을 도맡는 것은 비누이며, 이 어긋난 설정 속에서 놀이는 곧 괴롭힘이 되고, 괴롭힘은 다시 유희의 형식을 띠며 자기침식적 구조를 업그레이드한다. 언제나 향이 나야 하고 깨끗함을 담보해야 하는 비누는 종종(실은 자주) 뭉근하고 지저분한 최후를 맞이한다. 하지만 이렇게 비누가 모두 녹아, 그 안에 숨어있던 단단한 골조가 미끈하게 드러나면, 오히려 농밀해진 비눗물은 미끈한 조각의 표면을 계속해서 매끄럽게 유지해 준다. 시간이 갈수록 풍성해지는 거품 또한 양가적 장치이다. 신비롭기도 하지만 동시에 실체를 가리기도 하는 거품은 수줍음을 내포한 비너스의 탄생인지 수치심에 의한 연막작전인지,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 게거품인지 알 길이 없다. 거품은 드러냄과 은폐, 유희와 방어를 동시에 수행하며 어느 쪽으로도 고정되지 않는다. 결국 이 구조는 타인의 흔적을 경유해 자신을 마모시키는 선택의 반복이다. 이 과정에서 피해와 놀이는 서로를 구분하지 못한 채 뒤섞이고, 능동과 수동은 반복 속에서 형태를 바꾸며 작동한다. 남는 것은 오직, 구름처럼 커져가는 거품을 품은 금속 틀들이 무지갯빛 얼룩으로 오염되는 상황 속에서 자신이 스스로를 작동시켰다는 사실뿐이다.

 무수한 매력의 요소들이 모두 재단되어 정보화되고 수치화되는 태세 속에서 작가가 바라는 사랑의 형태는 콩 한 쪽도 나눠 먹을 수 있는 정량적 사랑이 아닌, 계속해서 서로를 침범하고 뒤섞이며 사탕 한 알도 번갈아 나눠 먹을 수 있는 액체적 형태의 사랑이 아닐까. 다 큰 어른이 되어서 이러한 희망을 품는 것 자체가 철 없는 욕심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선택적으로 욕심을 허락해 오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그리고 그 허용이 과연 오롯한 나의 기준에서 비롯된 것이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작가가 흘린 땀과 눈물과 타액은 결국 내 입속에서 쓴 맛 나는 사탕이 되어 그 안엔 달콤한 시럽이 들어 있다고 속삭인다. 천천히 쓴 맛을 참고 녹여내다 보면 내 혀를 달콤하게 뒤덮어줄 존재가 그 안에 있다고.



 아, 그런데 한가지 유념해야 할 점은, 달콤함을 빨리 맛보기 위해 쓴맛을 견디지 못하고 망치같은 어금니로 사탕을 깨부수면 안된다는 것이다. 단단하고 날카로운 설탕 조각이 부러진 칼날이 되어 베인 혀의 비릿한 피맛이 그 달콤함을 뒤덮어버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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